
[박성기 도보여행 칼럼니스트]신안은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섬의 천국이다.
1004개라서 천사섬인 신안은 물이 차 있는 만조(滿潮)에는 섬들이 바다에 노두(路頭 ·징검다리)를 올려놓은 것처럼 점점이 뿌려져 있다가, 물이 빠지는 간조(干潮)에는 섬들이 검은 갯벌에 알알이 보석을 수놓은 것처럼 모습을 바꾼다.
바다 밑이 거대한 펄밭인 신안의 몇몇 섬은 간조가 되면 마치 한 섬처럼 펄로 연결된다. 건너편 섬으로 가기 위해 돌을 드러난 갯벌 위에 하나씩 올려서 섬과 섬 사이를 건널 수 있는 돌 징검다리인 노둣길이 놓이게 된 것이다. 세월이 흘러 사람만 다니던 길이 지금은 차 한 대 다닐 수 있는 바다 위의 길이 됐다.
천사섬(신안) 12사도 순례길은 대기점도, 소기점도, 소악도, 진섬, 딴섬에 있는 작은 사도의 집을 따라 노둣길을 건너며 걷는 순례길이다. 밀물이 물이 차면 잠시 쉬고, 썰물이 되면 다시 길을 걷는 자연 친화적이고 힐링을 얻는 길이다. 사도들의 집은 유명 건축가들이사도의 상징을 살려독특하게 건축하였다.

아침이 막 기지개를 켤 무렵 부지런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다가 배에 오른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에 어깨가 움츠려진다.

봄이 완연한 4월의 시작이지만 아직 아침 바람은 차다, 송공항을 뒤로하고 6시 50분 목적지를 향해 배가 출발하였다. 바다를 가로질러 압해도(押海島)와 암태도(巖泰島)를 연결하는 압도적인 천사대교를 지나갔다.
대기점도(베드로, 안드레아, 야고보, 요한, 필립의 집)
다도해의 크고 작은 섬들이 느리게 왔다가 사라지길 몇 차례 출발한 지 50여 분 만에 대기점도 선착장에 도착했다. 선착장에 내리면 예수의 첫 번째 제자 베드로의 집(건강의 집, 작가 김윤환)이다. 깨질듯한 파란 하늘은 하얀 집과 대비되며 눈이 더 짙고 시리다.


지중해풍의 돔형 건물 옆으로 시작의 종이 눈에 들어온다. 천국의 문을 두드리듯 힘차게 손으로 ‘댕그렁’ 종을 치고 섬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아침 햇살에 비친 포구는 걷는 자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만조를 지나 썰물이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펄은 보이지 않고, 파도는 섬 가까이에 곡선을 그리며 긴 흔적을 남겼다 사라지곤 한다. 시간이 흐르면 차츰차츰 바다는 점차 검은 흙을 들어낼 것이다.

선착장 길을 따라 섬 안으로 들어선다. 섬의 오른쪽으로 걷기 시작하여 북촌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마을을 마주 보며 병풍도를 등지고 서 있는 두 번째 제자 안드레아의 집(생각의 집, 작가 이원석)이 보인다.

해와 달의 형상이라는 두 개의 지붕 꼭대기 위엔 하얀 고양이상(像) 두 마리가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바다를 바라보는 고양이상은 무슨 생각을 할까?
안드레아의 집 뒤로 멀리서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병풍도에서 노둣길을 건너 오는 사람의 모습이 아주 조그맣게 점으로 나타났다.
이른 새벽 쌀쌀한 기온은 살갗을 간지럽히는 싱그런 봄바람으로 바뀌었다. 마을의 지붕은 온통 붉은 페인트로 칠해져서 눈에 도드라진다.
유럽의 붉은 지붕을 연상해서 이랬을까....? 마을 앞과 길 주변엔 군데군데 유채꽃이 피어있다.
북촌마을을 지나 잠시 길을 따라가니 삼거리다. 삼거리에서 바라보니 멀리 논길 지나 숲 앞에 세 번째 제자 야고보의 집(그리움의 집, 작가 김강)이 보인다.
홀로 외떨어져 있어서 갔다가 돌아와야 한다. 시간도 여유 있고 천천히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의 집으로 향했다.숲 옆으로 듬성듬성 고개를 내민 진달래가 발길을 잡는다.
더 짙어진 붉음을 자랑하고 푸른 하늘로 풀섶에선 푸드득 새 한 마리가 날아오른다. 오늘은 내가 첫 손님인 모양이다. 꽃도 반기고 새도 반기고 풀과 나무도 반긴다. 흐르던 땀은 시원한 바람에 순식간에 사라진다.



야고보의 집 몸체는 흰 벽돌과 석회로 덮여있고 지붕은 붉은 기와다. 벽면에 새겨진 부조는 성덕대왕신종의 비천상을 오마주해 아주 독특했다. 창문을 통해 들어온 빛은 부조의 미세한 굴곡에 따라 밝음과 어둠의 농도를 주어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다시 길을 나서 남촌마을에 있는 네 번째 제자 요한의 집(생명 평화의 집, 작가 박영균)으로 향했다. 신라의 첨성대를 오마쥬 한 것으로 보이는 건물은 첨성대처럼 벽돌을 차곡차곡 둥글게 쌓아 올리고 그 위를 석회로 마감하였다. 요한의 집 문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병풍도와 여러 섬이 펼쳐져 있다.

좌측으로는 길게 이어진 선착장 길이 보이고 끝에는 길의 시작인 베드로의 집이 조그맣게 보인다. 베드로의 집에서 보이지 않던 주변의 모습이 이곳에서는 전체가 조망되는 바라보는 시점에 따라 전체가 보이고 부분이 보이는 것이다. 사람 사는 모습도 이와 다르지 않으리라.

대기점도의 마지막인 다섯 번째 제자 필립의 집(행복의 집, 작가 장미셀 후비오, 파코, 브루노)은 소기점도 가는 노둣길이 시작하는 곳이다.
물고기 비늘 모양의 지붕을 가진 집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가려졌던 바다 건너 소기점도가 눈에 들어오고 집 앞에 이르자 아래로 바다가 열리고 노둣길이다. 길을 시작할 때는 물이 가득했으나, 시간이 흘러 바닷물은 저만치 물러나고 갯벌은 시커먼 얼굴을 드러냈다. 생명의 땅이 드러난 것이다.
소기점도에서 건너오는 사람들이 노둣길에서 집까지 이어졌다. 지금껏 사람들을 보지 못했는데 소악도에서 내려 거꾸로 오는 순례자들이다.
소기점도(바르톨로메오, 토마스, 마테오의 집)
어느 바다에 섬과 섬 사이에 돌 징검다리[路頭]를 놓고 건널까. 갯벌의 천국인 신안의 몇몇 섬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지금 내가 이 자리 그 노둣길 앞에 서 있다. 돌을 던져 다리를 놓아야 했고 갯벌에서 생업을 해야 했던 옛 섬사람들의 고단함이 빙의되었다.
돌 징검다리에 길을 닦아 이제는 작은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이 되었지만 노둣길은 여전하다. 다만 시대가 바뀌었고 길의 모습만 바뀌었을 뿐....

노둣길을 건너 소기점도에 들어섰다. 뒤를 돌아보니 대기점도는 눈앞이지만 섬을 공간 이동한 것처럼 벌써 아득하다. 길을 따라 섬의 왼편으로 돌아 가자 길 왼쪽으로 호수가 있고 호수 안에는 황금빛 구조물이 물에 반사되어 아름답게 떠 있다.
예수의 여섯 번째 제자 바르톨로메오의 집(감사의 집, 작가 장미셀)이다. 찬찬히 호수를 한 바퀴 돌면서 스테인드 글라스로 지언진 조형물을 바라본다. 색유리는 호수에 반영되어 물주름에 반짝거린다.

호수를 지나 길을 따라 해안을 걸어 삼거리에 도착했다. 직진하면 소기점도 선착장이고 오른쪽 일곱 번째 제자인 토마스의 집으로 향했다.
언덕 위 하얀 토마스의 집(인연의 집, 작가 김강)은 유채꽃으로 화려했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조형물은 진한 파란색 문과 창틀을 가지고 있다. 벽에는 예수의 기적을 보인 오병이어의 모습이 양각되어 있다.

토마스의 집을 지나자 바다를 바라보고 걷는 자들을 위한 의자가 놓여 있어 자리에 앉아 바다를 바라 본다. 길을 서두를 필요는 없다. 몸이 지치면 잠시 쉬어가는 것도 또한 길 걷는 자의 기쁨이고 소기점도의 마지막 지점이라 잠시 쉬어가리라.


소기점도와 소악도 사이 노둣길 중간에 그리스 정교회 교회를 닮은 황금색 돔의 건축물이 예수의 여덟 번째 제자 마태오의 집(기쁨의 집, 작가 김윤환)이다. 지금처럼 물이 빠지면 노둣길 위의 교회이지만 바닷물이 가득 차는 만조에는 바다 위의 교회가 되는 독특한 건축이다.
소악도(작은 야고보의 집)
소악도에 들어섰다. 소악도는 산으로 가로막혀 오른쪽 해변으로 따라 걷기 시작하자 잘 구획된 논을 나타난다. 순간 내가 섬이 아니라 육지를 걷는 착각이 들었다.

섬의 중간쯤의 소악교회를 지나 길을 진행하자 다시 진섬을 건너는 노둣길 앞 삼거리이고 쉼터가 있다. 쉼터 앞 바다는 낡은 나룻배 한 척이 있어 시간이 정지되어 오래전부터 그곳에 있었던 듯하여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쉼터에서 오른편으로 100여 미터 들어가면 산으로 올라가는 숲 앞에 소악도에 있는 유일한 사도의 집이 있다. 아홉 번째 제자인 작은 야고보의 집(소원의 집, 작가 장미셀)이다. 동화 속에 나옴 직한 미끄럼틀 모양의 아름다운 곡선의 지붕과 색유리로 만든 물고기 모양이 창이 어울린 독특한 건축물이다.
진섬(유다 타대오, 시몬의 집)
소악도에서 노둣길을 걸어 진섬으로 들어갔다. 노둣길이 끝나는 지점에 알패오의 아들이며 작은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 타대오의 집(칭찬의 집, 작가 손민아)이 소악도를 바라보고 서 있다.

건축은 왕관 모양의 건물과 뾰족한 지붕마다 달린 네 개의 작고 앙증맞은 창문이 있다.
우측으로 길을 따라 숲길로 들어섰다. 600여 미터를 더 들어가자 모래언덕에 시몬의 집(사랑의 집, 작가 강영민)이다.

문이 없는 건물을 통해 바다가 바라보이는 것은 저 넓은 세계로 퍼져나가는 뜻이 아닐까. 단순한 건축물이지만 열린 세계로 퍼져가는 종교의 의미로 해석된다.오늘의 마지막 사도 가롯 유다를 만나기 위해 숲속으로 난 길을 따라 딴 섬으로 향했다.
딴섬(가롯 유다의 집)
숲길을 따라 걷다가 갑자기 숲이 없어지며 섬의 끝이다. 건너편 아주 조그마한 딴섬이 보인다. 모세의 기적처럼 길이 바다로 연결되어있다. 지금까지 섬과 섬이 연결되었던 노둣길이 아니라 온전한 바닷길이다. 만조가 되면 완전한 고립이 되는 섬이 딴섬이다.

딴섬은 열두 제자의 막내 가롯 유다의 집(지혜의 집, 작가 손민아)이다. 뾰족지붕과 붉은 벽돌, 둥근 첨탑의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11명의 제자들이 섬과 섬사이 노둣길을 통해 스승 예수와 연결되어 있다면, 예수를 제사장들에게 팔아넘긴 막내 가롯 유다의 집은 노둣길이 아닌 바다 건너 딴섬이라는 단절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가 되었다.
평안을 얻는 길
아침 대기섬 선착장에 도착하여 시작한 길을 소기점도와 소악도, 진섬을 지나 딴섬에서 끝이 났다. 섬과 섬 사이 노둣길과 싱그런 4월의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꽃과 들풀, 맑은 하늘과 같이 한 12사도 길을 마감하였다.
다섯 개의 작은 섬에 예수의 열두 제자를 모티브로 하여 펼쳐진 길은 종교인에겐 종교의 길이고, 비종교인에게는 섬과, 노둣길과, 건축을 통해 얻는 힐링의 길이다.단절된 시대에 징검다리를 놓듯 12사도 순례길은 소통과 교류의 장이며, 생명의 길이었다. 그저 자유로이 길을 걸으며 마음을 놓겠다고 왔다가 오히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가는 가슴 벅찬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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